
젠슨 황 "수요는 엄청나고, 제약은 생산능력"… 기판 2.5배·패키징 3배·테스트 2배·광엔진 15배 증설
삼성전기 엔비디아 기판 공급망 신규 합류, 앰코는 한국에서 인터포저 캐파 300% 확대
엔비디아가 반도체를 '사는' 회사에서 공급사의 '공장을 예약하는' 회사가 됐다. 엔비디아는 21일(현지시간) 독일에서 열린 GTC 베를린에서 기판·첨단패키징·테스트·광엔진 등 후공정 공급망 전반의 생산능력 확대 계획을 발표했다. 일부 협력사에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생산능력 예약 선급금(capacity reservation advance)'까지 내줬다. 고객이 돈을 미리 내고 공급사 증설을 떠받치는 것은 부족이 단기에 끝나지 않는다는 고객 스스로의 판단에 가깝다. 이번 발표에서 한국 기업으로는 삼성전기가 엔비디아 기판 공급망에 새로 이름을 올렸고, 앰코는 한국 내 첨단패키징 증설을 공식화했다.
엔비디아가 발표한 '공급망 증설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프라 구축을 진행하고 있다"며 "수요는 엄청나고, 제약 요인은 생산능력"이라고 말했다. 이날 공개된 증설 계획을 공정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기판: 이비덴(일본)·삼성전기(한국)·유니마이크론(대만)과 함께 엔비디아향 기판 생산능력을 향후 3년간 2.5배로 확대
- 첨단패키징: 앰코가 2028년 말까지 한국 내 인터포저 웨이퍼 생산능력을 300% 이상 확대, 한국 신규 제조시설도 병행
- 테스트: 엔비디아 전체 테스트 생산능력을 2027년 2026년 대비 2배로 확대. 대만 KYEC는 엔비디아의 11억 달러 선급금으로 미국에 신규 테스트 시설을 짓고 2027년 4월 양산 목표
- 광엔진(CPO): 대만 SPIL이 공동패키징광학(CPO)용 광엔진 생산능력을 2027년 중반까지 15배로, 2028년 말까지 다시 2배로 확대
골드만삭스는 이번 발표에 대해 "광범위한 생산능력 확대는 엔비디아가 기존 예상보다 훨씬 큰 물량 증가(램프)를 준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평가했다.
선급금의 의미: 돈을 내고 공장을 예약하다
이번 발표의 핵심은 증설 규모보다 '누가 돈을 내느냐'에 있다. 엔비디아는 일본 이비덴의 오노 공장에 수십억 달러 규모의 생산능력 예약 선급금을 제공해 공장 생산능력을 현재의 3배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추가 생산능력은 2028년 1분기부터 가동된다. 대만 유니마이크론의 기판 증설도 생산능력 예약 계약으로 지원하며, 유니마이크론은 2027년 2분기 증설을 시작해 2028년 중반 풀가동에 도달할 예정이다.
JP모건은 "이비덴 측도 증산 투자는 고객이 지불한다고 설명해왔다"며 "오노 공장 증설은 주로 엔비디아를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공급사 입장에서는 수요 불확실성과 투자 부담을 고객에게 넘기고 물량을 확보하는 구조다. 반대로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공급 병목을 돈으로 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지난주 시장을 흔든 'AI 인프라 과잉투자' 논쟁과 달리, 공급망 최상단의 고객은 여전히 '부족'에 대비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한국 1차 수혜: 삼성전기와 앰코코리아
한국 쪽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삼성전기다. 엔비디아 발표에 따르면 삼성전기는 엔비디아 기판 공급망에 새로 참여해 한국의 기존 설비에서 즉시 공급을 시작한다. 엔비디아는 세종·부산 사업장의 설비 업그레이드와 신공장 건설도 지원하며, 2028년까지 엔비디아향 물량이 삼성전기 연간 패키지기판 생산능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전망이다.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21일 유가증권시장에서 삼성전기는 SK하이닉스·삼성전자에 이어 거래대금 3위에 올랐고, 22일 장전 프리마켓에서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하락한 가운데 삼성전기는 상승했다. 삼성전기는 앞서 20일 3,605억 원 규모 패키지기판 공급계약을 공시하기도 했다.
다만 기존 1위 업체의 지위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JP모건은 "삼성전기 합류로 이비덴의 엔비디아 내 점유율이 다소 낮아질 수 있지만, 이비덴이 높은 1위 점유율을 유지할 것"이라며 "ABF 기판 수급이 타이트한 상황에서 관건은 각 사가 얼마나 빨리 생산능력을 늘릴 수 있느냐"라고 봤다. 삼성전기에는 '진입' 자체보다 증설 속도와 수율이 다음 과제가 되는 셈이다.
첨단패키징에서는 앰코가 한국을 거점으로 택했다. 앰코는 2028년 말까지 한국 내 인터포저 웨이퍼 생산능력을 300% 이상 늘리고 신규 제조시설도 짓는다. 골드만삭스는 이를 'CoWoS-R 생산능력 3배 확대'로 표현했다. 인터포저는 GPU와 HBM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는 핵심 부품으로, TSMC 중심이던 첨단패키징 공급망의 일부가 한국으로 분산된다는 의미가 있다.
2차 수혜: 계약은 못 받아도 '가격'을 올린다
엔비디아와 직접 계약하지 않은 국내 기판 업체들도 쇼티지의 수혜를 받고 있다. 공급이 빠듯해지면서 판가 협상력이 공급자 쪽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교보증권은 심텍의 3분기 매출을 5,606억 원(전년 대비 +50.4%), 영업이익을 843억 원(+353.5%, 영업이익률 15.0%)으로 추정했다. 엔비디아 등이 도입하는 서버용 저전력 메모리 모듈 SOCAMM 물량이 본격적으로 늘어나고 BT 기판 가격 협상력이 높아지는 시점이 맞물렸다는 분석이다.
키움증권은 티엘비의 3분기 영업이익을 170억 원(+97%, 영업이익률 18.1%)으로 전망하며 "이례적인 공급자 우위 환경"이라고 평가했다. 4분기부터 최대 가동에 들어가 분기 매출 1,000억 원을 넘길 것으로 보이며, 쇼티지 심화로 4분기 중 추가 판가 인상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2분기 말 수주잔고는 1,318억 원으로 1분기(539억 원)의 2.4배였다. 키움은 투자의견 '매수', 목표주가 5만 3,000원을 유지했다. 21일 거래대금 상위에는 심텍, 대덕전자, 코리아써키트 등 기판주가 함께 이름을 올렸다.
병목은 장비로도 번지고 있다. 메리츠증권은 대만 디지타임스를 인용해 AI 서버 PCB가 고다층·저손실 소재로 바뀌면서 신호 품질을 떨어뜨리는 불필요한 비아(via) 구리층을 깎아내는 '백드릴링' 장비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고 전했다. 고가 PCB일수록 불량 한 장의 손실이 커져, 장비 평가 기준이 '장비 가격'에서 '양품 PCB 1장당 총가공비'로 바뀌고 있다는 설명이다. PCB 출하량이 정체되더라도 장비 수요는 늘어날 수 있는 구조다.
반도체 밖으로: 피지컬 AI도 '공급망'이 된다
엔비디아는 같은 행사에서 피지컬 AI 사업 성과도 강조했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엔비디아의 2027회계연도 상반기 피지컬 AI 매출은 110억 달러로, 2026회계연도 전체보다 약 30% 많다. 엔비디아는 휴머노이드 레퍼런스 로봇 'Agile ONE SN'(2027년 초 출시 예정)과 로봇 학습 도구 Isaac Lab 3.0, 오픈소스 런타임 Isaac OS를 공개했다. 젠슨 황은 "로보틱스 분야의 챗GPT 모먼트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LG이노텍이 엔비디아와 피지컬 AI·로봇 센싱 솔루션을 공동 개발한다고 밝혔고, 레인보우로보틱스는 "삼성과 휴머노이드 개발을 거의 마쳤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도됐다. 21일과 22일 로봇주가 강세를 보인 배경이다. AI 데이터센터에서 시작된 엔비디아 공급망이 로봇 부품까지 넓어지고 있다.
이번 발표가 실제 숫자로 확인되는 시점은 3분기 실적 시즌이다. 삼성전기가 실적 발표에서 엔비디아향 물량과 선급금 여부, 세종·부산 증설 일정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내놓을지가 첫 번째 관전 포인트다. 이비덴의 '2028년 1분기' 가동 시점이 달력 기준인지 엔비디아 회계연도 기준인지도 실적 발표에서 확인될 전망이다. 심텍·티엘비 등 2차 수혜주는 4분기 판가 인상이 실제로 이뤄지는지가 실적 눈높이를 좌우한다.
AI 인프라를 둘러싼 '과잉투자' 논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공급망 최상단의 엔비디아는 돈을 미리 내고 줄을 세우는 쪽을 택했다. 적어도 후공정에서는 '누가 공장을 갖고 있느냐'가 경쟁력이 되는 시기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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