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3년까지 5,000억달러 규모 의약품 특허 만료 위험
머크는 지난해 암 치료제 키트루다로 317억달러를 벌었다. 회사 전체 매출 650억달러의 절반에 가깝다. 단일 의약품으로는 2025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약이었다. 문제는 이 거대한 수입원이 영원하지 않다는 점이다. 키트루다의 미국 내 핵심 특허는 2028년부터 만료된다. 이후 비슷한 효능을 내는 값싼 바이오시밀러가 등장하면 매출이 빠르게 줄어들 수 있다.
이처럼 특허가 끝난 뒤 복제약이 나오면서 매출이 급감하는 현상을 제약업계에서는 ‘특허 절벽’이라고 부른다. 일반 제조업체는 소비자가 찾는 동안 같은 제품을 계속 팔 수 있지만, 제약사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경쟁사에 시장을 열어줘야 한다.
특허는 신약 판매를 시작한 날이 아니라 개발 초기부터 시간이 흐른다. 임상시험과 허가에 10년 이상 걸리면 실제로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시장조사업체 노스텔라의 분석을 인용해 2033년까지 특허 만료 위험에 놓인 의약품의 세계 매출이 5,000억달러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이 금액이 모두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현재 높은 가격에 팔리는 유명 의약품 상당수가 싼 복제약과 경쟁하게 된다는 의미다.
키트루다를 지키면서 다음 약을 찾는 머크
머크의 대응은 크게 두 갈래다. 키트루다의 매출을 가능한 한 오래 지키는 한편, 줄어들 매출을 메울 새로운 의약품을 찾고 있다. 첫 번째 방어책은 키트루다의 투여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기존 키트루다는 환자가 병원에서 약 30분 동안 정맥주사를 맞아야 한다. 새로 출시한 ‘키트루다 QLEX’는 피부 아래에 주사하며 투여 시간이 1~2분에 불과하다. 환자와 병원 모두 편리한 만큼 머크는 기존 키트루다 이용자를 QLEX로 옮겨 바이오시밀러 출시 이후에도 시장점유율을 지키겠다는 전략이다. 머크는 2년 안에 키트루다 환자의 30~40%가 QLEX를 사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출시 초기인 2025년 QLEX 매출은 4,000만달러에 그쳤다. 그러나 올해 2분기에는 한 분기에만 4.63억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아직 전체 키트루다 매출과 비교하면 작지만, 환자를 새 제품으로 옮기려는 전략이 조금씩 성과를 내기 시작한 셈이다.
두 번째 대응은 키트루다와 함께 사용할 새로운 치료제를 만드는 것이다. 머크와 모더나는 환자의 종양 특성에 맞춰 제작하는 암 치료제 ‘인티스메란’을 공동 개발하고 있다.두 회사는 지난 8월 19일 수술을 마친 흑색종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3상에서 인티스메란과 키트루다를 함께 투여했을 때 키트루다만 사용한 경우보다 암의 재발과 전이를 늦췄다고 발표했다.인티스메란은 키트루다를 대신하는 약이 아니다. 키트루다 위에 새로운 치료제를 더하는 방식이다. 향후 허가를 받으면 키트루다의 특허 만료로 줄어들 매출을 메울 별도의 수입원이 될 수 있다.이번 결과는 개인별 종양에 맞춘 치료제와 mRNA 기반 암 치료제가 임상 3상에서 성공한 첫 사례라는 의미도 있다. 다만 구체적인 임상 수치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고, 규제기관의 허가도 남아 있다. 실제 매출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머크는 인수합병에도 적극적이다. 자체 개발만으로는 시간이 부족한 만큼 이미 임상이 상당 부분 진행됐거나 판매 중인 의약품을 가진 회사를 사들이는 것이다.시장에서는 키트루다 매출이 특허 만료가 시작되는 2028년 약 350억달러로 정점을 찍을 것으로 보고 있다. 머크는 현재 개발하거나 확보한 의약품들이 2030년대 중반 연간 700억달러 이상의 사업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추산한다. 아직 성공 가능성을 반영하지 않은 회사 측 전망이지만, 키트루다 이후를 준비하는 머크의 목표를 보여준다.
오젬픽과 엘리퀴스도 특허 만료 부담
비만·당뇨 치료제 시장을 키운 노보 노디스크도 특허 절벽에서 자유롭지 않다. WSJ이 노스텔라 자료를 분석한 결과 노보 노디스크의 2025년 매출 가운데 77%는 2033년까지 특허 보호가 약해지는 의약품에서 나왔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제품은 당뇨 치료제 오젬픽이다. 지난해 매출은 약 200억달러였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2030년대 초까지 핵심 특허가 남아 있지만 캐나다와 인도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보호 기간이 끝났다. 캐나다 보건당국은 지난 4월 오젬픽과 같은 성분을 사용한 첫 제네릭 의약품을 승인했다. 이후 다른 회사들도 복제약을 내놓기 시작했다. 오젬픽이 앞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겪게 될 가격 경쟁을 캐나다에서 먼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과 화이자가 함께 판매하는 혈전 예방약 엘리퀴스도 특허 만료를 앞두고 있다. WSJ에 따르면 엘리퀴스의 지난해 매출은 약 140억달러였다. 이 약은 BMS와 화이자가 공동으로 사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복제약이 나오면 두 회사가 함께 영향을 받는다. 회사마다 매출을 기록하는 방식이 달라 각 회사가 공시한 숫자를 단순히 더할 수는 없지만, 두 회사 모두 엘리퀴스를 주요 수입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같다.
특허를 쌓아 복제약 출시를 늦추기도
제약사들은 새로운 치료제를 찾는 동시에 기존 의약품의 독점 기간을 늘리려고 한다. 성분뿐 아니라 제조법과 투여 방법, 용량 등에 관한 특허를 추가하는 방식이다. 애브비의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휴미라가 대표적이다. 유럽에서는 2018년부터 바이오시밀러가 판매됐지만, 미국에서는 2023년에야 경쟁 제품이 나왔다. 애브비가 100건이 넘는 관련 특허를 확보하고 경쟁사들과 출시 시점을 합의하면서 미국 내 경쟁을 5년가량 늦췄다. BMS의 다발성 골수종 치료제 레블리미드도 비슷했다. 미국 복제약 회사들은 2022년부터 제품을 팔 수 있었지만 판매 물량이 제한됐다. 제한 없이 판매할 수 있게 된 것은 2026년 1월 31일부터다.
따라서 특정 특허 하나가 끝나는 날짜만으로 매출 감소 시점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여러 특허와 소송, 제약사 간 합의에 따라 복제약이 실제로 시장에 나오는 시기는 몇 년씩 달라질 수 있다.
신약 가진 바이오기업 몸값 높아져
특허 절벽이 가까워지면서 대형 제약사들은 신약 후보를 가진 바이오기업을 적극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신약을 처음부터 개발하기보다 임상시험을 어느 정도 마친 회사를 인수하는 편이 빠르기 때문이다. WSJ이 금융정보업체 LSEG 자료를 인용한 데 따르면 올해 2분기 세계 제약·바이오 분야 M&A 규모는 1,140억달러로 2019년 이후 가장 컸다. 머크와 애브비, GSK는 올해 들어 각각 50억달러가 넘는 인수 거래를 발표했다.
바이오 스타트업에도 다시 돈이 들어오고 있다. WSJ은 올해 2분기 바이오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액이 약 150억달러로 2021년 이후 최대였다고 전했다. 대형 제약사에 기술을 팔거나 회사 자체를 매각할 가능성이 커지자 투자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레볼루션 메디신스의 췌장암 치료제 라손크가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라손크는 이전에 한 차례 이상 치료받았지만 병이 진행됐거나, 여러 약을 함께 쓰는 치료를 받기 어려운 전이성 췌장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다. 처음부터 사용하는 1차 치료제는 아니다. 500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에서 라손크를 투여한 환자의 생존기간 중간값은 13.2개월이었다. 기존 항암치료를 받은 환자는 6.7개월이었다. FDA는 당초 예정일보다 6개월 반 앞당겨 지난 8월 26일 이 약을 승인했다.
일라이 릴리는 아직 시간이 있다
모든 제약사가 같은 처지는 아니다. 일라이 릴리의 당뇨 치료제 마운자로와 비만 치료제 젭바운드는 핵심 특허가 2036년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당장 대규모 특허 만료를 걱정해야 하는 머크나 BMS와 비교하면 10년가량의 시간이 남아 있다.맥킨지의 그렉 그레이브스는 WSJ에 대규모 특허 만료가 제약사들로 하여금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도록 만드는 핵심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특허 절벽은 제약사에는 위기지만 환자에게는 약값이 내려갈 기회이기도 하다. 복제약과 바이오시밀러가 나오면 비슷한 치료를 더 낮은 가격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몇 년간 글로벌 제약업계에서는 신약 임상과 대형 M&A가 잇따를 가능성이 크다. 키트루다처럼 잘 팔리는 약을 얼마나 오래 지키느냐, 그 매출이 줄기 전에 다음 제품을 찾아낼 수 있느냐가 대형 제약사들의 성적을 가르게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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