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픽] 데이터로 보는 최근 5년 간 국내 유행 산업 사이클](https://d1gl51xbrxoj65.cloudfront.net/uploads/2026/05/26/1779778882082-tz76o.webp)
기업의 정관 내 '사업 목적' 추가는 종종 미래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혁신으로 포장되지만, 실상은 자본 시장의 유행을 쫓는 꼬리표 달기인 경우가 적지 않다. 주식 시장을 휩쓴 테마주 광풍은 과연 기업들의 실제 움직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뉴스에포크가 분석한 대상은 자본 시장을 주도한 핵심 테마 키워드(AI/머신러닝, 가상자산, 메타버스, 이차전지 등)를 최근 사업 목적에 신규 등재한 이력이 있는 200개 상장 및 주요 비상장 기업이다. 시계열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자본 시장의 하이프 사이클(Hype Cycle)이 우리가 생각하는 기술 트렌드와 일부 유사한 것이 확인됐다.
2022년: 가상자산·메타버스 광풍과 차가운 소멸
시중 유동성이 넘쳐나던 2021년~2022년, 자본 시장의 블랙홀은 단연 '가상자산'과 '메타버스'였다.
데이터에 따르면, 가상자산 키워드를 사업 목적에 등재한 기업은 전체 분석 대상 200개사 중 총 24개사(12%)였다. 연평균 4개사 꼴이었으나 2022년에만 무려 12개사가 집중적으로 몰리며 평년 대비 3배(300%) 폭증했다. 전체 200개사 중 16개사(8%)가 택한 메타버스 역시, 그중 절반에 가까운 7개사가 2022년에 간판을 고쳐 달며 유행에 편승했다.
하지만 이들의 열기는 유동성 축소와 함께 급격히 식었다. 이듬해인 2023년 가상자산 신규 등재 기업은 단 1곳으로 급감 했고, 메타버스 역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는 해당 사업 목적 추가가 장기적인 R&D 플랜이 아닌 단기적인 트렌드로 마무리 되었다.
2024년 'AI 블랙홀'과 사명 변
과거의 테마가 휩쓸고 간 자리는 곧바로 새로운 유행이 채웠다. 2023년 주식 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이차전지' 테마를 거쳐, 최근 자본의 이동을 가장 압도적으로 보여주는 테마는 단연 'AI/머신러닝'이다.
AI 관련 키워드를 사업 목적에 올린 기업은 전체 분석 대상의 과반을 훌쩍 넘는 123개사(61.5%)에 달한다. 특히 챗GPT 열풍이 본격화된 이후인 2023년 20개사, 2024년 27개사로 급증하며 정점을 찍었다.
단순히 사업 목적을 추가하는 것을 넘어, 아예 기업의 정체성인 '사명'까지 갈아끼우는 극단적인 쏠림 현상도 포착된다. 2024년 이후 'AI/머신러닝' 관련 키워드를 새로 등재한 회사 52곳 가운데 무려 60%에 달하는 31곳이 같은 시기에 사명 변경을 단행했다.
코스닥 상장 제약사였던 에스텍파마는 2024년 4월 사명을 '폴라리스에이아이파마'로 바꾸며 'AI 솔루션 개발'을 추가했고, 올콘텐츠앤브이알(All Contents & VR)은 같은 해 3월 '올콘텐츠앤에이아이'로 간판을 고치며 'VR'을 'AI'로 한 글자만 갈아끼웠다. 과거 사이클에서 새로운 사이클로 옮겨가는 자본시장의 무게중심이 사명에 그대로 새겨진 셈이다.

생존 본능인가, 꼬리표 달기인가… '테마주 카멜레온'의 실체
이러한 하이프 사이클에 올라탄 기업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우려스러운 지점이 발견된다. 유행에 맞춰 사업 목적을 쇼핑하듯 수집하는 '다중 테마(Multi-theme)' 기업들이다.
데이터 분석 결과, 200개 기업 중 19개사가 3개 이상의 핫 트렌드 키워드를 사업 목적에 중복으로 등재했다. 대표적으로 휴림로봇(전 디에스티로봇)은 AI/머신러닝, 이차전지, 메타버스, 가상자산, 신약/바이오, 반도체까지 무려 6개의 핵심 테마를 모두 사업 목적에 쓸어 담았다. 메디콕스 역시 가상자산(NFT), 이차전지, 우주/위성 등 5개 테마를 연달아 추가했다. 페스트롤에서 앤유엔터테인먼트, 다시 뿌리깊은나무들로 사명을 거듭 바꾼 한 기업은 2022년 메타버스와 블록체인을 적어 넣은 뒤, 2024년에는 AI 버추얼 휴먼을 추가하기도 했다.
업종의 경계를 허무는 융합의 시대라지만, 본업과 무관한 트렌드 키워드를 5~6개씩 나열하는 것은 기업의 펀더멘털 강화보다는 M&A 시장에서의 매각 가치 제고나 주가 부양을 위한 '착시 효과'를 노린 행보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
성공적인 자금 조달로 이어진 사례
물론 테마주 편승 전략은 자본 조달 측면에서는 효과적인 사례도 있었다. 사명 변경과 AI 등재를 동시에 진행한 31개사 중 8곳은 등재 직후 100억 원 이상의 대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갤럭시코퍼레이션은 1,000억 원 이상, 폴라리스에이아이는 500억 원 이상의 실탄을 확보했다.
문제는 쏟아진 자본이 실제 비즈니스 성과로 이어지고 있느냐다. 트렌디한 키워드로 포장해 자금을 끌어모았더라도, 차가운 재무 성과표 앞에서는 결국 민낯이 드러난다. 2022년 메타버스 및 NFT를 신규 등재했던 뿌리깊은나무들의 경우 등재 이후 3년 매출 성장률(CAGR)이 -94.5%를 기록하며 사실상 매출 기반이 붕괴됐다. AI 테마에 올라탄 다른 수많은 기업들 역시, 3~5년 뒤 매출 성장이라는 엄중한 검증의 무대를 피할 수 없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최근 실체 없이 인공지능 사업을 표방하는 'AI 워싱(AI washing)'에 대한 전면적인 제재를 예고했다. 자본 시장이 특정 키워드에 부여하는 프리미엄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면서, 껍데기와 실체를 분리해 내는 것이 감독 당국의 최우선 과제가 된 것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블록체인, 메타버스, NFT, 그리고 이번의 AI까지, 같은 모양의 사이클을 차례로 통과해 왔다. 그 흐름 속에는 묵묵히 해당 산업 안에서 기술과 매출을 쌓아 올린 회사들이 있고, 사업목적 한 줄과 사명 한 줄로 사이클에 합류한 회사들도 있다. 등재 시점에는 같은 키워드 아래 묶이지만, 사이클이 한 바퀴 돈 뒤에는 명암이 갈릴 것이다. 그 갈라짐을 더 빨리, 더 정확하게 가려내는 시장의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업 재무 데이터 · 투자 리포트 · 창업 분석을 한 곳에서
Pitchdeck 체험하기매주 엄선된 뉴스, 이메일로 받아보세요
매주 금요일 발행 · 1초 해지